과거 축구에서는 등번호나 명칭만으로도 선수의 역할이 명확히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현대 축구는 끊임없이 진화하며 포지션 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최전방 공격수가 미드필더처럼 내려오고, 측면 수비수가 중앙 미드필더 역할을 수행하며, 골키퍼마저 빌드업의 시발점이 됩니다. 이 글에서는 '가짜 9번(False 9)', '인버티드 풀백(Inverted Fullback)', '스위퍼 키퍼' 등 현대 축구에서 새롭게 등장하거나 중요성이 커진 포지션 역할들의 개념과 전술적 의미,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선수들에게 요구하는 능력은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번호가 전부가 아니다: 경계를 허무는 현대 축구 포지션
오랫동안 축구 포지션은 골키퍼(GK), 수비수(DF), 미드필더(MF), 공격수(FW)라는 큰 틀 안에서 비교적 명확한 역할 분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등번호 9번은 최전방 스트라이커, 10번은 창의적인 플레이메이커, 7번과 11번은 빠른 측면 윙어를 상징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전술이 고도화되고 선수들의 신체 및 기술 능력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현대 축구에서는 이러한 전통적인 포지션 개념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감독들은 경기 중 유연하게 포메이션을 바꾸고, 선수들에게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을 요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역할이 등장하거나, 과거에는 부수적이었던 역할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데이터 분석의 발달 역시 선수들의 움직임과 역할을 이전보다 훨씬 더 세밀하게 분석하고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단순히 포지션 이름이나 등번호만으로는 선수의 실제 역할을 완벽하게 설명하기 어려워진 시대입니다.
골문 앞의 지휘자: 스위퍼 키퍼와 빌드업 골키퍼
과거 골키퍼의 주된 임무는 상대의 슈팅을 막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축구에서 골키퍼는 더 이상 골라인 앞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특히 높은 수비 라인을 사용하는 팀들이 많아지면서, 골키퍼가 페널티 박스 바깥까지 나와 수비 뒷공간을 커버하는 '스위퍼 키퍼(Sweeper Keeper)' 역할의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독일의 마누엘 노이어는 이러한 역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대표적인 선수입니다. 그는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며 마치 최후방 수비수처럼 팀 수비에 기여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에는 골키퍼가 팀의 빌드업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빌드업 골키퍼' 또는 '볼 플레잉 골키퍼(Ball-playing Goalkeeper)'가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들은 상대의 압박 속에서도 침착하게 발밑 기술을 사용하여 동료 수비수나 미드필더에게 정확한 패스를 연결함으로써 팀 공격의 시작점 역할을 합니다. 맨체스터 시티의 에데르송이나 리버풀의 알리송 베케르처럼 뛰어난 킥 능력과 패스 능력을 갖춘 골키퍼들은 팀의 전술 운용에 엄청난 다양성을 더해줍니다.
수비수는 수비만? 측면의 지배자, 윙백과 인버티드 풀백
측면 수비수, 즉 풀백(Fullback)의 역할 변화 역시 현대 축구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과거 풀백은 주로 상대 윙어를 막는 수비적인 역할에 치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풀백이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여 측면 공격을 지원하는 '공격형 풀백' 또는 '오버래핑 풀백'이 중요해졌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3백 시스템에서는 양쪽 측면 전체를 책임지는 '윙백(Wing-back)'이라는 역할이 등장했습니다. 윙백은 공격 시에는 윙어처럼 높이 올라가 크로스를 올리거나 직접 공격에 가담하고, 수비 시에는 빠르게 내려와 측면 수비를 담당해야 하므로 엄청난 체력과 공수 양면의 능력을 요구합니다. 안토니오 콘테 감독은 윙백을 활용한 전술로 큰 성공을 거둔 바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인버티드 풀백(Inverted Fullback)'의 등장이었습니다. 이는 풀백이 측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팀이 공을 소유했을 때 중앙 미드필더 영역으로 좁혀 들어와 플레이하는 역할을 의미합니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 전술을 대중화시켰으며, 아스날의 미켈 아르테타, 토트넘의 엔지 포스테코글루 등 많은 감독들이 이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인버티드 풀백은 중앙 지역에서 수적 우위를 확보하고, 더 다양한 패스 경로를 만들며, 공을 빼앗겼을 때 즉시 중앙에서 압박(카운터 프레싱)을 가하는 데 유리하다는 전술적 이점을 제공합니다.
중원의 엔진이자 두뇌: 레지스타, 메짤라, 그리고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는 축구에서 가장 복잡하고 다양한 역할이 존재하는 포지션입니다. 단순히 수비형(DM), 중앙(CM), 공격형(AM)으로 나누기 어려운 세분화된 역할들이 현대 축구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예를 들어, '레지스타(Regista)'는 수비 라인 바로 앞에서 뛰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를 의미합니다. 뛰어난 시야와 패스 능력을 바탕으로 후방에서부터 경기의 템포를 조절하고 공격의 방향을 설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안드레아 피를로가 이 역할의 대명사이며, 최근에는 조르지뉴 같은 선수들이 유사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박스 투 박스(Box-to-Box)' 미드필더는 이름 그대로 자신의 페널티 박스부터 상대 페널티 박스까지, 즉 경기장 전체를 누비며 공수 양면에 걸쳐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는 선수를 뜻합니다.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 등이 대표적이며, 현대 축구에서도 이러한 유형의 미드필더는 팀의 엔진 역할을 합니다.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메짤라(Mezzala)'는 주로 4-3-3 포메이션에서 중앙 미드필더(No.8) 중 한 명이 측면과 중앙 사이의 공간, 이른바 '하프 스페이스(Half-space)'에서 주로 활동하며 공격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드리블 돌파, 침투, 플레이메이킹 등 공격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며, 케빈 더 브라위너나 니콜로 바렐라 같은 선수들이 메짤라 역할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여줍니다. 한편, 과거 공격의 핵심이었던 전통적인 '10번'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은 점차 줄어들거나, 압박 능력과 활동량까지 겸비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최전방의 변신: 가짜 9번과 인사이드 포워드
공격수 포지션 역시 큰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과거 최전방 공격수는 주로 페널티 박스 안에서 골을 노리는 '타겟맨'이나 '포처' 역할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축구에서는 최전방 공격수가 미드필드 지역까지 깊숙이 내려와 플레이하는 '가짜 9번(False 9)' 역할이 중요하게 부상했습니다. 가짜 9번은 자신이 직접 득점을 노리기보다는, 상대 중앙 수비수들을 자신에게 끌어내어 뒷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으로 침투하는 윙어나 미드필더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미드필드 싸움에 가담하여 수적 우위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리오नेल 메시가 바르셀로나 시절 이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세계 축구를 지배했고, 프란체스코 토티나 호베르투 피르미누 역시 대표적인 가짜 9번으로 꼽힙니다. 측면 공격수의 역할도 변화했습니다. 과거에는 터치라인을 따라 돌파한 후 크로스를 올리는 전통적인 '윙어'가 주를 이루었지만, 현대 축구에서는 측면에 배치되지만 중앙으로 파고들며 직접 슈팅을 노리거나 동료와 연계 플레이를 펼치는 '인사이드 포워드(Inside Forward)'가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리버풀의 모하메드 살라(오른쪽 배치, 왼발잡이)나 토트넘의 손흥민(왼쪽 배치, 양발잡이)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4-3-3 이나 4-2-3-1 같은 포메이션에서 핵심적인 득점원 역할을 수행합니다.
유연성과 지능: 현대 축구가 선수에게 요구하는 것
스위퍼 키퍼부터 인버티드 풀백, 레지스타, 메짤라, 가짜 9번, 인사이드 포워드에 이르기까지, 현대 축구 포지션 역할의 진화는 몇 가지 중요한 경향을 보여줍니다. 첫째, 포지션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수비수는 빌드업에, 공격수는 수비에, 미드필더는 공수 양면에 걸쳐 그 어느 때보다 복합적인 역할을 요구받습니다. 둘째, 선수들에게 높은 수준의 전술적 유연성과 지능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한 경기 안에서도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거나 변화하는 전술 지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졌습니다. 셋째, 단순히 특정 능력치(예: 속도, 피지컬)뿐만 아니라, 공간 이해도, 판단력, 동료와의 연계 능력 등 축구 지능(Football IQ)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현대 축구에서 성공하기 위해 선수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다재다능하고 지능적인 플레이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포지션 역할의 진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축구를 더욱 복잡하고 매력적인 스포츠로 만들어나갈 것입니다.